인텔의 인사 부문 부사장 신디 하퍼는 “인재 채용 경쟁이 치열하다”라며, “반도체 시장은 채용 수요에 비해 지원자 공급 규모가 작기 때문에 기업보다는 지원자가 채용 시장에서 좀 더 우위에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팹리스 업체 아이디얼 세미컨덕터(iDEAL Semiconductor)의 CEO인 마크 그래너헌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도 부족한 상태”면서 “특정 직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 인력이 부족하다”라고 밝혔다.
반도체 시장의 인재 부족 현상은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이미 발생했고, 칩 공급 부족 상황에도 영향을 줬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그 상황이 더 악화된 모양새다. 가트너 리서치의 부사장 겸 애널리스트 앨런 프리슬리는 “코로나19로 반도체 수요 및 공급 예측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칩 부족 현상이 심화됐다”라고 말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같은 기업은 해외 칩 생산 문제로 기업 운영 전략에 영향을 받자,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면서까지 미국 내 칩 생산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작년에 특히 상황이 심각했다. 1월 발간된 미국 상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남은 칩 물량이 5일 치 정도만 있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 상무부 장관 지나 레이몬도는 “칩이 부족해 자동차 업체 등 칩 구매 기업은 실수 없이 남은 칩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생겼다”라며 “국가적 관점에서 이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미국 내 칩 생산 능력을 높이기 위해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새 공장에는 숙련된 노동자가 있어야 한다. 아이디얼 세미컨덕터의 경우 올가을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박사 학위를 가진 엔지니어가 필요했는데, 적합한 인물을 찾기까지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찾은 인재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데려오기까지 비자 문제로 9개월이라는 시간이 추가로 소요됐다.
그래너헌은 “유능한 이공계 분야 인재를 전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으로 영입하기 쉽게 법률적 절차가 뒷받침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라며 “아이디얼만뿐만 아니라 인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모두 같은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해외 고급 인재 유입하는 정책 필요
미국 노동통계청은 STEM(과학, 기술, 엔지니어링, 수학) 분야 인력을 찾는 수요가 2020년~2030년 사이 약 11%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STEM 교육 연구소 인스튜티드포프로그레스(Institute for Progress)는 고급 인재와 관련된 이민 정책을 개혁해서 미국의 부족한 고급 인력을 해외에서 영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인스튜티드포프로그레스 수석 펠로우 제레미 뉴펠드는 “무사안일주의 속에서 미국 정부는 이민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했다. 이민 신청자는 점점 많아지지만 이를 처리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예측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뉴펠드는 “미국은 30년 동안 이민 수용 가능 인원수를 바꾸지 않았다”라며 “시간이 지날수록 전 세계 인재는 미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스타트업과 첨단 업체가 세계 최고의 인재를 데려오고 기술을 선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뉴펠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최첨단 기술 산업이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게 인재를 영입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만들고, 이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며 기술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 내 이공계 분야 학위 취득자 수는 미국을 뛰어넘었다.
최근 미 하원의원은 초당파적 혁신법(Bipartisan Innovation Act, BIA)을 제시했다. 이 법률안은 핵심 안보 산업과 관련될 경우, 이공계 분야 석사 및 박사 학위 소유자는 연간 이민자 제한 인원수와 별개로 받아들이자는 내용이 포함한다. 그러나 이 조항이 향후 상원의원과의 협상 후에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뉴펠드는 이 외에도 핵심 안보 산업 이외도 이공계 분야 석박사 학위를 가진 졸업자에 한해서도 이민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펠드는 “미국 반도체 제조 업계에서 일하는 이공계 박사 학위자 75%가 미국 외 국가 출신이다”라며 “엔지니어링 분야 인재 부족으로 신규 공장 가동이 늦어지는 것을 이미 목격하고 있는 상태에서, 의회가 직접 나서 인재난에 대처하지 않고 수십억 달러 정도의 보조금만 지출한다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반도체 시장의 현주소
의회 연구 서비스(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생산량은 1990년 기준 전 세계의 40%를 차지했지만, 2020년에는 그 수치가 12%로 떨어졌다.미국이 세계 반도체 생산 분야에서 최하위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이 7~8%를 차지하고, 다른 나라는 이보다 더 낮다. 그러나 미국의 하락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가트너의 부사장 겸 애널리스트인 과라브 굽타는 “아시아 국가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이나 유럽은 일단 현재 수준의 점유율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일 것”이라며 “이후에 전략적으로 투자를 확대해 점유율을 늘려 아시아의 의존을 줄여가야 한다”고 말했다.
굽타는 “이는 몇 년은 물론 몇십 년이 걸릴 것”이라며 “미국이 35% 이상의 점유율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칩 제조가 최근 몇십 년 동안 아시아로 이동할 때, 주류 업체는 영향력을 뺏기지 않을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이고 성숙한 생태계를 만들었다”라고 지적했다.
칩 제조의 높은 원가와 복잡성으로 인해 미국 반도체 업체 대다수는 ‘팹리스 모델(fabless model)’를 선택했다. 즉, 설계는 미국에서, 제조는 타 국가에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 타 국가 대부분은 동아시아가 차지한다. CSIS (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에 따르면 현재 80%에 가까운 칩 제조가 동아시아에서 이뤄진다.
CSIS의 연구원인 그레고리 아커리는 “구글, 애플, 아마존을 포함한 미국 주요 IT 업체는 칩 생산의 약 90%를 대만의 TSMC이라는 업체 한 곳에 의존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TSMC도 미국에 투자 중이다. TSMC 홍보 관계자에 따르면 TSMC가 미국에 지을 ‘5나노’ 칩 제조 공장 부지는 미국 아리조나이며, 현재까지 순조롭게 공장을 준비하고 있다. TSMC는 2024년부터 미국 공장에서 칩을 생산할 예정이다.
시급한 근로자의 재교육
현대의 반도체 제조 설비는 크게 자동화되었지만, 여전히 제조 설비를 건설할 때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건설 이후에는 운영하기 위한 전문 기술 인력도 필요하다.기술 인재 관리 소프트웨어 업체 에잇폴드(Eightfold)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상황대로 간다면 미국 칩 제조 환경은 결국 성공적으로 구축될 예정이다. 에잇폴드는 “기술 관련 신규 및 재교육을 하거나 평소에 가지고 있던 능력을 기반으로 역량을 확장하는 인접 기술(adjacent skills) 교육에 집중하면, 미국의 칩 제조 환경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또한 “인접 기술 교육을 이용하면 미래에 더 필요하게 될 유망한 업무 역량을 직원에게 심어주면서, 개인의 역량을 완전히 새롭게 향상할 수 있다”라며 “이를 통해 기존 인력을 잠재적 반도체 인재로 변환해 인재 규모를 대폭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CHIPS 법안(CHIPS for America Act)’에서 제시한 세금 공제 및 투자 정책 등을 정부가 수용하기를 권고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 내 반도체 시장이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굽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책이나 인센티브 같은 지속적인 정부 지원이다. 이는 학생이 반도체 업종에 관심을 갖도록 유발하고, 기업이 인재를 모집하는 데 도움을 준다”라며 “대만, 중국 같은 국가는 최근 몇 년 동안 관련 정책을 마련해 지원했다”라고 강조했다.
아직 부족한 미국 정부의 지원
미국 정부는 반도체 업계에 인재를 유인해주는 정책에 대해 예산을 배정하지 못하고 있다. 상원과 하원이 ‘CHIP 법안’을 여러 차례 통과시키기는 했다. 이 법에선 세액 공제와 투자 혜택 등을 제시하며 미국 반도체 시장의 성장을 도와주는 장치가 마련됐다. 그러나 여전히 관련 예산은 배정하지 못하고 있다.비슷하게 미 상원은 미국 혁신 경쟁법(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 USICA)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반도체 제조 공장 건설, 확장, 현대화를 위해 39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아직 하원의 동의를 못 받고 있다.
굽타는 “CHIP 법안은 미국 내 투자를 촉진하고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정부의 지원은 미국 내 반도체 기업이 아시아 업체와 경쟁하는 데 도움을 준다”라며 “이미 아시아 국가의 반도체 업체는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30~40% 앞서 있는데, 이들 역시 각 국가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라며 설명했다.
인텔은 늘어나는 반도체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미 오하이오 지역에 반도체 공장 두 개를 짓고 있으며, 지금까지 여기에 투자한 비용만 약 200억 달러다. 인텔뿐만이 아니다. 삼성,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글로벌파운드리스(GlobalFouldaries)는 앞으로 3~5년 이내에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설비를 건설하거나 확장할 계획이다.
프리즐리는 “공급 부족과 상관없이 인텔 같은 업체는 차세대 공정 노드를 지원하는 신규 제조 설비가 필요하다”라며 “미국 정부가 반도체 제조에 투자하려는 의지를 계속 보여주고 있으므로, 미국은 신규 제조 업계에서 매력적인 시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칩 생산 업체뿐만 아니라 소규모 제조 업체도 미국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 해 울프스피드(Wolfspeed, 구 Cree Inc)는 뉴욕에 200mm 실리콘 카바이드를 위한 설비 공장을 만들었고, 글로벌파운드리스는 10억 달러를 들여 2번째 뉴욕 공장을 건설해 칩 생산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해야할 이공계 교육
한편 인텔의 경우 STEM 교육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학교 및 전문대와 제휴해 향후 10년 동안 신규 STEM 프로그램에 약 1억 달러를 지출하겠다고 밝혔다. 그와 별도로 미국 국가과학재단(US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은 국가적 인재 양성을 위해 5,000만 달러 규모의 비용을 투자해 STEM 교육을 지원할 예정이다.하퍼는 “인텔과 미 국가과학재단 사례만 집계해도 총 1억 5,000만 달러가 반도체 제조 교육 및 연구에 사용된다”라며 “조기 교육부터 시작해 중등 교육까지 STEM 인재를 육성하는 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이런 투자는 인력 문제에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장기 전략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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