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기의 고장이 부품의 불량이나 잘못된 사용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냥 수명이 다해서 고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전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물리 세계에서는 적정 수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editor@itworld.co.kr
고장은 필연적이다.
진공관 시대 컴퓨터도 그 당시엔 공학의 결정체였다. 이후 발전을 거쳐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수준의 연산 작업이 가능해졌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과거 구식 컴퓨터의 (지금 기준으로) 엄청난 크기와 한심할 정도로 느린 처리 속도를 보며 실소하곤 한다.
에니악(ENIAC)이 방 하나 크기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걸핏하면 작동을 멈췄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내부를 구성하는 진공관이 뜨겁게 달아올라 오작동을 한 탓인데, 이 진공관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컴퓨터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도체 전자공학을 통해 구현된 안정성은 속도와 크기의 발전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Image courtesy TexasDex/Wikipedia
가슴이 철렁하는 그 기분
지금은 하루에 열 번씩 컴퓨터 부품을 교체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고장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IEEE 전문가 톰 커글린은 부품 장애율을 나타내는 이른바 “욕조 곡선”을 설명했다. 조기 고장을 나타내는 “유아 사망” 부분이 있고(공장 내에서 테스트 중 고장 나는 경우가 많음), 그 뒤로 장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길고 평탄한 구간이 나오다가, 부품이 설계 수명의 끝에 도달하면서 급격하게 상승하는 구간이 나온다. 이 개념은 부품의 안정성이 높은 기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언젠가는 고장이 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복잡해지는 전자 시스템을 접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분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책상 위, 또는 데이터 센터의 부품은 과연 어느 정도의 고장 위험에 처해 있을까? Image courtesy McSush/Wikipedia
과전압 차단기
많은 사람들이 흔히 멀티탭을 “과전압 차단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 중에서는 급격한 전압 상승으로부터 장비를 보호하지 못하는 제품도 있다. 실제 보호 기능이 있는 제품이라 해도 컴퓨터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방식을 택한다(이 과정은 대부분 사용자가 알 수 없게 진행됨). 커글린은 “이 제품의 용도는 연결된 장치를 과전압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과전압이 발생할 경우 매번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과전압 차단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일반적인 멀티탭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일부 과전압 차단기는 과전압 차단이 작동 중인지 여부를 나타내는 기능도 있다. Image courtesy Tony Webster/Flickr
하드 드라이브
움직이는 기계 부품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결국 고장 나게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드 드라이브다. 웹 디자인, 기술 및 마케팅 업체 IgnitingBusiness.com의 대니 브루그맨은 “하드 드라이브에서 소음이 나기 시작한다면 시간 문제라는 뜻”이라며 “노후화의 조짐으로 소음이 나기 시작한 이후에도 드라이브는 더 이상의 경고 신호 없이 꽤 오랜 시간 동작하다가 결국 완전히 고장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버 지원 업체 스카이라인 서버(Skyline Servers)의 닉 티플은 “대부분의 소비자, 그리고 소규모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든 데이터를 저장해 둔 인프라의 한 요소가 몇 년 내에 완전히 고장 나게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Image courtesy Chris Bannister/Flickr
플래시 드라이브도 마찬가지
최근 일어나고 있는 플래시 메모리로의 대대적인 이동이 이러한 고장 위험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브루그맨은 “SSD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마모되긴 하지만 HDD에 비해 고장 가능성은 훨씬 더 낮다”고 말했다. SSD에도 여러 문제가 있다.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금속 산화물 층의 품질이 저하되고, 결국 서로 마찰하는 구동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장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지능적인 SSD 컨트롤러를 사용하면 늦출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시기를 늦출 뿐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브루그맨이 전한 동료 교수의 한 마디가 진리다. “데이터가 두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Image courtesy AmsterdamPrinting.com/Flickr
배터리
충전식 리튬 이온 배터리는 옛날 진공관과 마찬가지로 컴퓨팅 혁명을 촉발했다. 컴퓨터는 전원 소켓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제는 주머니에도 넣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진공관과의 또 다른 공통점은 어떤 장치에서든 가장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부품이라는 점이다. 배터리 음극의 이온을 양극으로 강제로 보내는 횟수가 많아지면(충전 과정) 결국 성능은 저하된다. 뎀스키 그룹(Demski Group)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앤드류 번스타인은 일반적인 전화기 배터리의 경우 1,000회 충전/방전 주기를 한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속 충전기를 사용하거나 극한 기후에서 지낸다면 더 짧아진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더 효과적인 배터리에 대한 연구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은 리튬이온 배터리 음극의 현미경 촬영 모습 Image courtesy Argonne Nat'l Lab/Flickr
무중단 전원 공급 장치
배터리가 문제가 된다면, 무중단 전원 공급 장치(UPS)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정전을 대비해 장비 옆에 대기하고 있는 배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포메이션 비즈니스 시스템(Information Business System)의 브라이언 맥나마라는 “UPS 배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품질이 저하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태를 전혀 확인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설치하고 나면 집안의 화재 감지기와 마찬가지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정전이 되면 그때 가서야 어렵게 교훈을 얻는다. 데이터 손실, 데이터베이스 손상, 운영체제 장애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맥나마라는 UPS 배터리는(화재 감지기와 마찬가지로) 분기마다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Image courtesy Alpha Technologies/Flickr
방화벽
사람들이 기기에서 기대하는 기능은 과거에는 물리적인 부품을 통해 구현되었지만 이후 서서히 소프트웨어로 그 주체가 바뀌었다. 소프트웨어는 하드 드라이브의 플래터처럼 “마모”되지는 않지만 그 유용성은 물리적 부품과 상당히 비슷한 양상으로 저하될 수 있다. 법률 회사를 대상으로 클라우드 기반 솔루션을 제공하는 리걸 워크스페이스(Legal Workspace)의 CEO인 조 켈리는 방화벽을 중요한 예로 들었다. 켈리는 “많은 개인과 기업이 방화벽을 주기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일단 설치만 하면 계속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화벽을 정기적으로 패치하지 않을 경우 취약점이 발생하게 된다”며, “물리적인 하드웨어 자체는 쌩쌩하게 돌아갈지 몰라도 방화벽 소프트웨어가 오작동의 주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은 주니퍼의 파이어월 내부. Image courtesy jackthegag/Flickr
클라우드의 붕괴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자. 사용자의 디지털 기기를 쓸모 없게 만드는 노후화가 기기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IEEE 전문가 스튜어트 립오프는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해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모든 앱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립오프는 “만약 이들 앱이 신생업체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다면, 해당 업체가 망하거나 앱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면서 사용할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분산 컴퓨팅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의 이면에서는 사용자가 의지하는 서비스가 완전히 통제권 밖의 조직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이다. 구글 리더의 서비스 중단에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필자의 말을 잘 이해햘 것이다. Image courtesy vijayakrishnan v/Flickr
절약! 재사용! 재활용!
지금까지 알아 본 부품 고장은 어디까지나 부품의 고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부품 하나가 잘못됐을 때 해당 기기 내부에 남아 있는 수많은 기술들이 모두 쓰레기로 보일 때가 있다. 심즈 리사이클링 솔루션즈의 부사장 션 마간은 “기기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마간은 “일단 업무 현장에서 쫓겨난 IT 부품은 새단장을 하거나 평가를 통해 재판매될 수 있다. 이런 가치를 확ㅇ니하는 것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중고시장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에 의해 수행된다”고 설명했다. 멀쩡한 부품을 쓰레기 매립지에 버리는 일도 막아 준다. Image courtesy George Hotelling/F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