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25주년] 애플의 5가지 성공과 실패

Dan Turner | Computerworld 2009.01.23

30살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속담을 기억하는가?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이미 그 나이를 훌쩍 넘었기 쉽다는 사실을 무시하더라도, 이 말을 믿는다면, 32살이 된 애플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1 24일에 25살이 되는 매킨토시만을 생각해본다면 매킨토시는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저널리스트들은 굵직한 기념일을 중요시하는데, 기념일로 인해 지난날을 회고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던 것들을 잠시 동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25년 전 애플은 조지 오웰의 1984를 풍자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제작한 광고(하단 영상)에서 처음으로 매킨토시를 공개했는데, 이 광고는 1984년의 슈퍼볼에서 전국적으로 딱 한번 방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의 대상이 되었다.



 

애플이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 시기에 첫 번째 매킨토시에 이어 여러 제품이 나왔다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면 지금쯤 마이크로소프트가 멋진 최신유행을 선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엇갈린 현실을 감안하여 애플이 지난 25년 동안 거둬온 다섯 가지 성공 사례와 실패한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하게 나열하고자 하며 이는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언급해 둔다.

애플의 성공 5선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

1983
년도의 컴퓨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에는 컴퓨터를 켜면 무엇이 보였을까? 까만 화면에 초록색 커서가 있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해당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으며, 수행방법을 아는 것만 컴퓨터로 작업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제한 받았다. 조셉 헬러(Joseph Heller)가 제안한 개념과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1984
년에 나온 첫 번째 매킨토시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컴퓨터 업계나 그 이외의 비슷한 업계의 거의 모든 것과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제록스의 PARC에서 처음 시도된 윈도우/아이콘/마우스/포인터(WIMP)로 이루어진 인터페이스는 한 눈에 알아보기 쉽고 대다수 개인용 컴퓨팅 인터페이스에서 따라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만일 세심하게 디자인된 매킨토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의해 제공된 일관되고 혁신적인 철학이 없었다면 상황은 악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애플의 휴먼 인터페이스 그룹(Human Interface Group)에서 사람들이 인터페이스의 다양한 부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반응하는지에 관해 이론과 실용의 양 측면에서 연구한 막대한 작업 결과 실현되었다. 이들은 매킨토시의 인터페이스의 애플리케이션과 원리를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Human Interface Guidelines: HIG)으로 만들어 출판하면서 버튼을 만드는 방법에서 드롭 그림자(drop shadow)가 화면 상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 지에서부터 사용자가 클릭한 후 시각적 반응이 얼마나 빨리 나타나야 하는지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실제로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였으며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로 그치지 않았다. 공개된 HIG를 사용하여 개발자들은 매킨토시의 인터페이스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유사하게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게 되었다. 사용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동할 때에 저장이나 이동과 같은 작업 방법이 달라져서 헷갈리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가? ‘수치스러운 인터페이스 모음(Interface Hall of Shame)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이 개념의 훌륭함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어서 애플의 행보에는 그 동안 실패도 있었으며 특히 애플이 맥 OS X로 이행했을 때 문제가 있었다.

MacPaint/MacWrite

오리지널 매킨토시에 번들로 나온 이 두 가지 획기적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여 사용자는 마우스를 클릭하고 드래그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새로운 개념인 WYSIWYG 방식으로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편집할 수 있었다. 가게에 전시된 모든 매킨토시는 이 프로그램들로 인해 대화형 광고판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엄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보세요 라고 말하곤 했다. 숙련된 프로그래머가 이전의 컴퓨터로 쉽게 해내던 것보다 더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다.

툴바(toolbar)와 드롭다운 메뉴를 갖춘 이 두 가지 애플리케이션은 MacWrite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 워드를 포함하여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올인원(all-in-one) 디자인

첫 번째 매킨토시는 사용자에게 친숙하고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올인원 디자인(키보드와 마우스는 제외)을 갖춘 새로운 모습으로 출시되었다. 심지어는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손잡이도 컴퓨터 위쪽에 달아놓았으며 넣고 다닐 가방도 있었다. 비록 들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어쨌던 간에 매킨토시는 경쟁 회사들의 케이블 더미로 이루어진 컴퓨터보다 훨씬 더 옮기기도 쉽고 구축하기도 쉬웠다.


AP7560.JPG

 

애플은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매킨토시와 모니터가 결합된 디자인을 버리고 사용자가 모니터를 선택하여 교체할 수 있도록 하고 , 쉽게 확장슬롯과 같은 부품을 다룰 수 있도록 한 제품을 출시했다. 바로, 1998년에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선보인 아이맥(iMac)이 그 주인공. 아이맥의 i는 인터넷(Internet)을 상징하는 것으로, 애플은 광고를 통해 아이맥의 간단한 인터넷 연결을 강조했다. 그냥 전원과 인터넷선을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는 설명(하단 광고 ). 이로서 아이맥은 연결된 세계를 비유하는 나머지를 위한 컴퓨터가 됐다.



 

이맥(eMac)을 포함한 아이맥의 후속 모델들은 우상적 존재였으며 애플의 베스트 셀러 중 하나였다. 사실 현재의 아이맥 라인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가용 데스크톱에 주력하지 않게 되어 전문가용 데스크톱이 오랫동안 발전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이행 절차

리눅스와 유닉스 사용자들은 제대로 된 배포판을 선택하고 , 재컴파일하며, 매뉴얼을 읽고 , 새로운 하드웨어 사양에 대한 온라인 포럼을 훑어보며, 이렇게 선택된 하드웨어에서 실행되는 운영체제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회사들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바꿀 때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종종 몸소 보여주곤 한다. 윈도우 XP에서 비스타로 이행했을 때 드라이버가 잘못된 사례나 64 비트 소프트웨어의 문제, 지금도 계속되는 하위 호환성(backward compatibility)의 악몽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애플은 한두 번도 아닌 4번 만에 이를 겨우 달성할 수 있었다. 애플은 사용자들을 68k에서PowerPC를 거쳐 인텔 프로세서 아키텍처로 이행했으며, 그 과정들이 쉽지는 않았다. 애플은 간신히 사용자들이 오류 없이 소프트웨어를 바꿀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 이행될 때는 첫 날부터 에뮬레이션 기술이 필요했다.

Mac OS 9
에서 Mac OS X로의 이행은 몇 년 동안의 삐걱거림을 거쳐 내키지 않아하는 사용자들이 새로운 운영 체제에 부분적으로나마 발을 담그도록 클래식(Classic) 환경으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현재도 OS 9라는 안전장치가 있어, 아직 OS X로 포팅되지 않은 중요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 수 있다.

아이팟(iPod)과 아이폰(iPhone), 그리고 아이튠즈 스토어(iTunesStore)

아이팟은 처음 나온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오리지널 모델이 소개되었을 때 이를 “절름발이”라고 말하면서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팟은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추세를 변화시켰다. 또한 아이폰도 모바일 전화기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AP0587.JPG
이 두 기기는 단순한 수익원 역할 이외에도 애플의 브랜드 가치를 크게 향상시켰다. 현명하게도 아이튠즈은 크로스 플랫폼으로 만들어졌으며(아이튠즈가 윈도우에 얼마나 잘 포팅되는 지는 별개의 문제로 간주한다) 아이팟은 단순한 매킨토시 사용자 이상의 존재로 사로잡을 수 있게 했다. 또한 두 기기로 인해 아이팟을 사랑함으로써 애플의 다른 멋진 제품도 확인해 보게 하는 “후광”효과를 초래했다.

넷북(Netbook)의 세계에서도 아이폰은 진정한 모바일 컴퓨팅의 세계로 한 발 내딛는 존재일 수 있다. 아이폰은 PC의 축소판이 아니다. 누가 조그만 휴대폰 화면에 시작 메뉴가 있길 바라겠는가? 그렇지만 아이폰은 새롭고 실용적인 패러다임을 향해 한 단계 상승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것이다. 이미 아이폰을 사용하여 SSH, 파일 교환(편집이나 저장은 불가함), WebEx 컨퍼런스 참가, 기타 흔히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복잡한 작업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구글을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을 바래왔는데, 아이폰이 가까운 장래에 이를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큰 기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애플의 시련

 

Apple III

매킨토시가 나오기 4년이 채 되기 전에 소개된 Apple III Apple에 뒤이어 나온 “사업용” 컴퓨터였다. 갈증을 느끼는 심오한 대중을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심오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타당해 보였다.  워즈라고 불리는 애플의 또 다른 창립자인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 많은 경우에 제대로 되지 않았다. 회로기판을 촘촘하게 배열해 짧은 회로를 만들어냈는데, 어떤 기술 게시판에서는 사용자들에게 Apple III를 선택한 후 칩들을 재배열하기 위해 몇 인치 정도 떨어뜨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잡스는 팬을 없앨 것을 요구하기도해서 하드웨어 상에 뜨거운 열과 관련된 문제가 야기됐다. (잡스는 오늘날까지 팬을 없애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마도 그 소리가 싫은가 보다) 또한 비싼 가격과 Apple II 소프트웨어와의 하위 호환성에서의 문제로 인해 Apple III는 큰 실패를 맛보았으며 업계에서의 애플의 평판이 꽤 훼손되었다.

문제의 퍼포마(Perfoma)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내쫓고 콜라 회사의 CEO였던 존 스컬리(John Sculley)를 영입한 후에는 매킨토시의 수많은 후속라인을 생산해냈다. 그 결과가 매킨토시 자체보다 덜 위협적으로 디자인된 퍼포마(Perfoma)였는데, 서로 거의 구분하기가 힘든 제품들의 잇단 출시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이들은 기본 하드웨어가 동일했으며 교육 모델, 직접적인 영업 모델, 대규모 시장 소비자에 대한 영업 모델 등 각각의 소프트웨어 번들은 서로 약간씩 틀렸지만 과연 누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또한 대부분의 퍼포마 컴퓨터는 쓰레기 같았다.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에서부터 끔찍한 것만 있었다. 예를 들어 “뚱뚱한 피자 상자”같은 데스크톱인 4400은 사업자들이 가볍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만 너무 품질이 떨어져 주변기기가 갑자기 작동되지 않거나 하드웨어 결함으로 인해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곤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고품질 제품을 보급한다는 애플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어 애플로 다시 돌아온 잡스는 품질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또한 신속하게 제품 라인을 일반 노트북 하나, 전문가용 노트북하나, 일반 데스크톱 하나, 전문가용 데스크톱 하나로 줄였다.

복제 기기


1995
년부터 1998년까지 애플은 라이선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시도한다. “애플은 언제가 되었던지 무너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플이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실제 매킨토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믿고 있다.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운영체제 제조사가 되었다면 마이크로소프트처럼 파죽지세로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논리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애플은 이를 시도했다. 이는 잡스가 없었던 시절에 시작된 개념이라는 것을 덧붙이고자 한다.


AP76EF.JPG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파워 컴퓨팅(Power Computing)의 놀라운 광고 캠페인의 내용을 실현하지는 못했다. 데이스타 디지털(Daystar Digital)은 당시에는 흔치 않던 멀티프로세서 사양으로 이를 시도했는데, 몇몇 저렴한 맥 복제품은 시장에서 호응을 얻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주문 생산(built-to-order)과 직접적인 영업 모델을 채택하였으며 파워 컴퓨팅은 전직 애플 엔지니어들을 고용하여 기술적 한계 일부를 뛰어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하드웨어 라이선싱 협정은 어리석고 근시안적이며 제한적인 발상이었다. 애플은 절대로 완전히 위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써드파티 개발자들은 애플의 강력한 지원이 없거나 높은 라이선싱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애플의 제품과 차별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다. 잡스가 돌아온 후에 그는 라이선싱 시도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라이선싱으로 차별화하는 전략이 너무 늦게 시작되었으며 복제품으로 시장을 확대하기는커녕 애플의 판매고를 잠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7년 후반에 애플이 1억 달러에 파워 컴퓨팅의 자산 일부를 사들이면서 모든 계획은 철회되었다.

아직까지도 이런 제품의 포스터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고가 아닌 교육 부문의 영업구조

Apple II
는 당시 교육 시장에서 가장 확고한 존재였다. 가격은 비쌌지만 튼튼하고 관리하기 쉬우며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애플은 그로부터 계속 교육 시장에서 강력한 존재로 남아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이렇게 된 원인 중 일부는 애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윈도우 95가 출시된 후 마이크로소프트는 강력한 네트워크와 자금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물량의 윈도우 PC를 중등학교나 고등 교육 기관에 기부했다. 이는 미래의 윈도우 사용자를 훈련시키는 효과뿐만 아니라 장부상의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효과도 있었다.

애플은 교육 부문의 영업에서 손쉽게 성공한 경향이 있다. 애플은 교육 부문의 영업력을 여러 번 재배치했지만 델이나 IBM과 같은 회사처럼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일례를 들어 주요 대학에서 컴퓨터 시스템을 담당하는 필자의 친구가 비용을 절감하면서 새롭게 컴퓨터 교실을 구축하려고 했을 때, 델과 HP, 기타 회사들은 그에게 벌크 가격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당일 지원과 교실 전체의 사양을 구성하고 설치할 수 있는 기술자 팀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애플의 반응은 “가장 가까운 애플 대리점은......이고 그 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였다고 한다. 그것도 소비자 가격으로 말이다.

거추장스럽고 이상한 온라인 전략

당시 AOL이나 CompuServe와 같은 회사가 진을 쳤던 온라인 분야에서 애플은 자체적으로 이월드(eWorld)라고 부르는 온라인 사이트를 구축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 이후 애플은 아이툴즈(iTools)을 만들었지만 이는 결국 폐기되었다. “클라우드(cloud) 서비스”를 맛보게 해 준다고 약속한 .Mac도 있었지만 일년에 99달러나 들고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는 최근에 웹 2.0의 느낌이 더 강해진 모바일미(MobileMe)로 다시 만들어졌지만 나오자마자 서비스 중단으로 고초를 겪었다. 여전히 유료이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Live 개념도 전세계를 흥분시키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온라인에서 애플이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애플의 빈약한 서비스는 서비스를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까지 지난 25년 동안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살펴보았다. 물론 각 분야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30년을 살아오면서 적든 많든 이겨본 적이 없거나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댄 터너는Salon, eWeek, MacWeek, The New York Times에서10년 넘게 과학과 기술분야에 대한 기사를 저술하고 있다.editor@idg.co.kr

회사명 : 한국IDG | 제호: ITWorld | 주소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23, 4층 우)04512
| 등록번호 : 서울 아00743 등록발행일자 : 2009년 01월 19일

발행인 : 박형미 | 편집인 : 박재곤 | 청소년보호책임자 : 한정규
| 사업자 등록번호 : 214-87-22467 Tel : 02-558-6950

Copyright © 2024 International Data Grou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