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 : 진정한 PC의 기원

Lamont Wood | Computerworld 2008.08.14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올해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PC의 시초가 되었던 기기가 탄생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처럼, PC의 기원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수십 년간 우리는 x86의 등장을 기점으로 PC의 역사를 계산해 왔다. 4비트였던 4004 칩이 1971년 첫 개발된 이후, 1972년 인텔의 8008칩이 등장,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로 그 이름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x86의 개발은 1972년이 아닌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x86은 인텔에서 개발한 것이 아니라 현재는 사라지고 없어진 샌안토니오의 한 기업에서 잊혀진 엔지니어 오스틴 O. "구스" 로체(Austin O. "Gus" Roche)가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이다. 로체는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혼을 쏟았던 엔지니어로 유명하다. 인텔은 마지못해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8008도 4004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었다. 이 둘은 각각 서로 다른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휴스턴에 위치한 NASA의 협력업체 중 하나인 존 프라사니토 & 어소시에이츠(John Frassanito & Associates Inc.)의 회장 존 "잭" 프라사니토(John "Jack" Frassanito)는 1968년 어느 날 샌안토니오의 사교 클럽에서 로체가 식탁보에 새로운 차원의 기기 개발에 대한 계획을 차근차근 그리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전설적인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wey- 코카콜라 병과 스튜드베이커 아반티 등을 디자인한 인물)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사니토는 샌안토니오에 위치한 컴퓨터 터미널(Computer Terminal Corp-CTC)로 이직, 모델 33 텔레타입(Model 33 Teletype)에 대한 전자적 대체 수단으로서 개발되고 있던 CTC의 첫 제품에 대한 설계를 돕게 된다. CTC의 존재는 이를 이끈 전 NASA 엔지니어 필 레이(Phil Ray), 그리고 로체와 함께 최근 재조명 받고 있다.

 

샌안토니오에 도착한 프라사니티노는 곧 텔레타입 대체 프로젝트가 CTC의 주된 목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창업 멤버들이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과정 중 하나였던 것이다.

 

투자자가 이해할 수 없는 사업 목적은 숨겨라

프라사니토는 "사업 계획서를 작성할 때,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투자자들은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개념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당시 현존하던 기술을 이용한 프로젝트를 구상해야만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데이터포인트 3300(Datapoint 3300)을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수익원을 확보한 CTC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설계가 시작되었고, 프라사니토는 설계 과정에 참여하면서 로체가 그토록 염원하던 개인용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프라사니토는 개인용 컴퓨터의 모습과 기능에 대해서 로체와 긴 토론을 나누던 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로체는 가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 고전 속의 내용들을 인용하며 토론을 전개해 나가곤 해 자신도 별 수 없이 이들 작품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기를 시장에 무난히 입성시키기 위해, CTC 창업자들은 이를 (약간의 프로그래밍 수정을 거쳐) IBM 029 카드 펀치 기기의 대체제로 홍보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IBM 펀치 카드와 비슷한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화면의 높이를 반으로 줄였고, 사무실 직원들이 이질감없이 익숙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IBM 셀렉트릭 타입라이터(IBM Selectric typewriter)와 동일한 입력 방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개발된 최초의 제품은 그러나 열이 지나치게 많이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었고, 1969년 말에서 1970년 초까지 디자이너들은 지나친 열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기기 구성 부품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CPU 보드를 한 개의 칩으로 축소시킨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인텔, 로체의 설득으로 칩 개발에 참여

로체는 1970년대 초 로체와 함께 당시 막 메모리 칩을 생산하는 신생기업이었던 인텔의 밥 노이스(Bob Noyce) 회장을 만났다. 로체는 노이스에게 CPU 칩을 생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로체는 새로운 개념의 칩이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며, 인텔이 자체 비용으로 이 칩을 생산해 CTC를 포함한 여타 관련 기업들에게 판매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프라사니토는 "당시 노이스는 로체의 제안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고, 인텔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를 사업화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며, "노이스는 컴퓨터 칩을 생산하면, 컴퓨터 당 한 개 밖에 팔지 못하지만, 메모리는 컴퓨터 당 수백 개를 판매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이스는 로체의 설득에 넘어가 5만 달러 규모의 CPU 칩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프라사니토가 회고한 내용은 2006년 9월 캘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에서 열린 한 그룹 인터뷰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그룹 인터뷰에는 인텔 최초의 CPU 칩을 개발하고 마케팅하는데 관여했던 6명의 인물이 참여했다. 페데리코 페긴(Federico Faggin), 할 피니(Hal Feeney), 에드 겔바흐(Ed Gelbach), 테드 호프(Ted Hoff), 스탠 메이저(Stan Mazor), 그리고 행크 스미스(Hank Smith) 등이 바로 그들. 이들은 당시 인텔이 CPU 칩을 생산할 경우 타 컴퓨터 생산업체들이 인텔을 경쟁업체로 간주, 메모리에 대한 구매마저 끊을까 봐 전전긍긍해 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73년까지 이러한 우려는 계속되었다. 더불어 1970년 여름 CTC이 칩 기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접고, TTL(Transistor-Transistor-Logic) 회로를 이용한 CPU 보드를 적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인텔은 CTC에 공급하던 1201 칩에 대한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TTL은 마이크로회로에서 진보한 새로운 차원의 통합 기술이다. 당시 칩의 경우 수십 개 단위의 트랜지스터만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TTL를 이용하면 수천 개 단위의 트랜지스터를 한 번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텔의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던 호프는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보다 그리 놀라진 않았다고 말했다. 호프는 당시 CTC 프로세서 구조에 대해 "1만 6,000바이트 규모의 메모리까지 소화해 낼 수 있었다. 메모리에 그 정도의 비용을 투자할 정도였으니, TTL를 사용하기 위해 드는 50달러 정도의 추가 비용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당시 메모리는 비트 당 1센트 정도였으므로, 16KB는 1,280달러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이를 현재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거의 6,700달러에 달한다.

 

데이터포인트 2200의 등장

 

 

CTC의 TTL 기반 데스크톱 개인용 컴퓨터인 데이터포인트 2200은 1970년 첫 선을 보였다. 2200에는 130KB 용량의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8K의 내장 메모리가 탑재되어 있었다. 2200은 제너럴 밀스(General Mills)사에 1970년 5월 25일 처음 40대가 판매되었다.

 

IBM의 마케팅 모델을 도입한 CTC는 곧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리스 사업도 시작했다. 당시 8K의 메모리를 탑재한 컴퓨터를 빌리기 위해서는 한 달에 168달러를 내야 했고, 2K의 메모리를 탑재한 컴퓨터를 빌리려면 148달러를 내야 했다. 더불어 모뎀을 추가하려면 30달러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RAM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CTC는 내장 메모리로 재순환 방식의 MOS 메모리를 사용했다. MOS 메모리의 경우 첫 바이트를 액세스하는데 최대 500μs가 걸렸고, 그 다음 바이트부터는 8μs 정도가 걸렸다.

 

1970년대 IDC의 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는 지프 데이비스 미디어 마켓 엑스퍼츠(Ziff Davis Media Market Experts) 부회장 애런 골드버그(Aaron Goldberg)는 데이터포인트 2200을 최초의 일인용 미니 컴퓨터 중 하나로 기억했다. 골드버그는 당시 데이터포인트 2200이 IBM 5320과 동급으로 평가 받았다며, "이 둘은 기업용 컴퓨터로써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기업용 애플리케이션을 다운사이징하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논리 연산 장치의 크기가 8비트 정도 됐지만, 프로세서들이 1바이트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8번의 루프를 돌아야만 했다고 당시 CTC에서 근무했던 현 퍼프테크(Perftech Inc.) 부회장 조나단 슈미트(Jonathan Schmidt)는 말했다.

 

CTC 칩에 대한 생산이 중단된 이후 인텔은 일본 전자계산기 제조업체였던 비지컴(Busicom)에게 납품할 4비트 프로세서 4004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비지컴은 사실 CTC보다 먼저 인텔과 사업관계를 구축한 기업이었고, 4004 프로젝트도 CTC 칩 개발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후 6개월 뒤 또 다른 일본 기업인 세이코 홀딩스(Seiko Holdings Corp.)가 CTC에 납품하던 1201 칩을 과학 계산기 생산에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인텔은 1201 칩에 대한 개발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CTC 측과의 갈등으로 1201 칩 개발이 지연되면서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기존에 16핀이었던 1201 칩을 18핀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번 셈이 되었다.

 

CTC는 또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Inc)에게도 1201 칩 생산 계약을 체결했지만, 1970년 말에서 1971년 초부터 납품되기 시작한 TI 버전의 1201 칩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결국 TI 측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다. 컴퓨터 역사박물관 인터뷰에 참가했던 전 직원들도 TI의 실패에 대해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TI가 실용화하기엔 부적절한 것으로 평가 받았던 인텔 측의 설계를 그대로 활용하는 바람에 실패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텔의 1201 칩은 1971년 말 CTC에 공급되기 시작되지만, 당시 CTC는 데이터포인트 2200 II를 개발하고 있는 상태였다. 데이터포인트 2200 II는 이전 버전보다 훨씬 빨랐고,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지원했기 때문에 CTC 경영진들은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졌던 1201 칩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임원진 투표 결과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CTC는 1201 칩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인텔에 넘기고 말았다. 프라사니토에 의하면, 당시 로체는 임원진 투표 결과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1201 칩에 대한 권리는 인텔로

프라사니토는 "로체는 칩 안에 한 대의 컴퓨터를 설계한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매우 획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지적재산권만큼은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증언했으며, "그러나 임원진들은 굳이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기술에 대해 5만 달러의 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다고 반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였다"고 덧붙였다.

 

4004는 1971년 11월 그 모습을 드러내며, 최초의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로 그 이름을 드날리게 된다. 8008이라고 개명된 1201 칩은 1972년 4월 120달러의 가격으로 시중에 판매되었다. 4004와는 달리 8008은 당시에 막 등장했던 표준 RAM과 ROM 메모리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에는 칩 하나로 주류 컴퓨터와 경쟁하는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순조롭게 칩 사업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고, 인텔 경영진들도 덕분에 투자 실패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1972년 로체, 레이, 그리고 프라사니토는 데이터포인트 2200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고, 최초의 PC에 대한 특허권을 가진 사람들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후 몇몇 기업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한 개별 특허를 출원했고, 이들 특허와 관련된 소송은 수십 년간 진행되었다.

 

1974년 인텔은 8008과 똑같은 구조를 기반으로 한 8080 칩을 출시했는데, 실제로 8080 칩 개발에는 데이터포인트 2200 II 개발 과정에서 CTC 엔지니어들이 고안했던 아이디어들이 많이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8080 칩은 40핀 패키지를 사용함으로써 출력 신호 송신에 필요한 지원 칩의 수를 줄일 수 있었고, 이러한 지속적인 성능 향상 노력을 바탕으로 8080 칩의 후속 작들은 결국 "x86 왕조"를 세우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 중에는 1981년 최초의 IBM PC에 사용되었던 8088 칩도 포함되어 있다.

 

전 CTC 임원이었던 빅터 D. 푸어(Victor D. Poor)는 "오늘날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PC들을 보면, 그 근간은 항상 그 뿌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이외에 무수히 많은 기능들이 추가되었다는 점이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PC의 원조

인텔은 x86 제품군으로 지금까지 수십 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반면 CTC는 1972년 말 사명을 데이터포인트로 개명했고, 데이터포인트 2200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엔지니어들 중 일부는 1977년 등장한 최초의 상용 로컬 네트워크인 ARCnet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데이터포인트는 회계 비리에 연루되는 등 상당한 부침을 겪게 된다.

 

결국 여타 컴퓨터 생산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 데이터포인트는 지난 2000년, 남은 자산들을 모두 처분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그들이 뿌린 씨앗이 가져다 준 무한한 성능 향상 및 비용 절감 효과로 인해 기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로체는 1975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레이는 1987년 사망했다. 노이스는 1990년 세상을 떠났다. 프라사니토는 1975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데이터포인트를 떠났고, 이후 우주 왕복선 및 우주 정거장 사업 관련 일에 종사해 왔다.

 

데이터포인트 2200은 결국 그들이 표면적으로나마 내세웠던 IBM 029 카드 펀치의 대체제로서 사용되지는 못했다.

 

*Lamont Wood는 프리랜서 기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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