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지

데이터 스토리지, GB당 100만 달러에서 2센트가 되기까지

Lucas Mearian | Computerworld 2017.03.28
1967년 컴퓨터월드 창간 당시 1MB 하드 드라이브를 구축하려면 100만 달러가 필요했다. 지금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의 MB당 가격은 약 2센트다.

이 50년 동안 데이터 스토리지는 보조 기술 정도로 취급됐지만 웨스턴 디지털(WD)의 미디어 컴포넌트 부문 부사장인 오웬 멜로이는 데이터 스토리지는 항상 프로세서나 소프트웨어와 마찬가지로 현대 컴퓨터 시스템을 받치는 5개의 기둥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플래시 메모리가 없으면 스마트폰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멜로이는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를 가리키며 “저렴한 스토리지가 없으면 인터넷도 없다”고 말했다.

1980년대 IBM 14인치 HDD와 오늘날의 3.5인치 HDD의 비교. 전자의 용량은 200MB이며, 후자는 10TB로 5만 배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하드 드라이브가 없었다면 그 뒤를 따른 기술,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의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부터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알아보려면 컴퓨터월드가 창간되기 1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초가 된 하나의 의사 결정
때는 1956년이다. IBM 연구소 개설을 맡아 4년 전 웨스트 코스트로 파견된 레이놀드 존슨은 이후 50명의 엔지니어를 채용해 연구소를 운영했다. 이곳의 임무는 거대한 펀치 카드를 대체할 새로운 데이터 기록 매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IBM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를 선택한 이유는 IBM 뉴욕 포키프시 연구소에 비해 기후가 따뜻해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 공학도들에게 그만큼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직 고등학교 과학 교사로 표준화된 양식 위에 쓰인 2번 연필심을 감지하는 전자 시험 채점 기계를 발명하기도 했던 존슨은 산호세 연구 팀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에 전념하도록 했다.

1956년 발표된 IBM 350 디스크 시스템. 무게 1톤에 높이 1.7m였다. 직경 60cm 디스크 50개에 최대 5MB를 저장했다.

1959년에서 2014년까지 IBM에서 다양한 스토리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엔지니어 데이비드 베넷은 “존슨은 새로 채용한 연구원에게 늘 스스로 정해서 일을 하라고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누가 요청할 때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항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컴퓨터 역사 박물관의 안내원으로 일하는 베넷이 IBM에서 처음 맡은 일은 시스템/360 메인프레임을 위한 직접 액세스 대량 스토리지 장비, 2321 데이터 셀 드라이브(Data Cell Drive)였다. 셀 드라이브는 최대 10개의 교환이 가능한 착탈식 데이터 셀로 구성되는데, 각 셀에는 200개의 마그네틱 스트립이 있었다.

당시 IBM 메인프레임은 강자성 기록 물질로 코팅된 금속 실린더로 구성된 드럼 메모리와 테이프 드라이브를 모두 사용했다. 자기 테이프는 용량이 컸지만 접근 시간이 느렸고, 드럼 메모리는 접근 속도는 우수했지만 용량이 작았다.

IBM은 두 가지의 장점을 합친 스토리지를 원했다.

존슨이 결심하고 지시를 내렸다. IBM 메인프레임용 스토리지는 회전하는 접시(플래터)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구 팀은 세계 최초의 하드 드라이브인 IBM 350 디스크 스토리지 유닛 개발에 착수했다.

IBM 305 RAMAC 시스템용 고속 스토리지로 만들어진 IBM 350은 무게가 약 1톤에 달했으며, 높이는 173cm, 너비는 74cm였다. 옮기려면 지게차가 필요했지만 혁신적인 장비였다. 자기 산화철 페인트로 코팅된 직경 60cm의 디스크 50개에 최대 5MB를 저장할 수 있었는데, 이는 과거의 어떤 시스템보다 더 큰 용량이었다. 평균 탐색 시간은 600ms초였다.

IBM 350의 디스크 플래터는 1,200rpm 속도로 회전했다. 하키 퍽 크기의 읽기/쓰기 헤드 한 쌍이 수직 축에 고정되고, 이 축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플래터당 100개의 트랙에서 데이터를 읽었다. IBM 350은 2년이 지나지 않아 저장 용량을 두 배로 늘렸다. 앞으로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속도는 빠르게, 크기는 작게
1981년부터 1991년까지 DEC(Digital Equipment Corp.)의 본부장으로 재직한 톰 버니스는 1969년 미국 미네소타 주 이다이나에 소재한 CDC(Control Data Corp.)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CDC는 IBM 대체를 목표로 활동했던 당시 10여 개의 주요 기술 기업 중 하나였다.

버니스는 이후 25년 동안 하드 드라이브를 개발하면서 CDC뿐만 아니라 드라이브 제조업체 맥스터(Maxtor)에서도 일했다. 버니스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CDC 844-21 하이 퍼포먼스 드라이브(HPC) 설계였다. 약 320kg의 무게에 디스크 사이에 양압을 생성하는 산업용 송풍기를 탑재한(가정용 보일러 팬 크기) 장비였다. 이 드라이브의 최대 저장 용량은 100MB였다.

버니스를 비롯한 업계 스토리지 연구자들은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 더 고밀도의 더 빠른 하드 드라이브를 만드는 방법을 찾는 일에 전념했다. 단순히 회로 크기를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기계적, 물리적 한계도 극복하고 산업 표준도 만들어야 했다.

이들의 연구가 결실을 맺으면서 데이터 스토리지는 세탁기 크기의 디스크 컨테이너에서 최대 10TB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3.5인치 플래터로 발전했다(또는 2TB 저장이 가능한 2.5인치 드라이브).

10TB는 의회 도서관 전체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약 850km 길이의 책장에 보관된 책 2,900만 권, 기록물 270만 개, 사진 1,200만 장, 지도 480만 개, 필사본 5,800만 개를 포함한 1억 3,000만 개의 항목이다.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업계는 RAMAC 시절 평방 인치당 수천 비트 수준이었던 디스크 플래터의 면적당 밀도를 오늘날 평방 인치당 1조 3,300억 비트까지 높였다. 버니스는 “면 밀도의 단위가 6~8자리 높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스토리지 가격도 싸졌다. IBM이 최초의 디스크 드라이브를 만들었던 1956년을 시작으로 하드 드라이브의 평균 가격은 매년 41% 하락했다. 반도체에 대한 무어의 법칙과 같은 속도다. 하드 디스크 가격은 기가바이트당 200만 달러에서 지금은 2센트까지 낮아졌다.

버니스가 DEC에 합류할 무렵 하드 드라이브 업계는 1GB의 벽을 넘어서는 중이었고 전문가들은 드라이브 밀도가 12~18개월마다 두 배씩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물론 급속하게 성장하는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용 컴퓨팅 시스템 시장에서 하드 드라이브는 신속하게 표준 부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너무 흔해진 탓에 그 과정에서 극복해야 했던 기술적인 과제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드라이브의 읽기/쓰기 헤드는 회전 디스크에서 불과 0.25마이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업계는 이렇게 비유했다. 보잉 747 여객기가 지상에서 15cm 떨어진 높이에서 시속 965km의 속도로 날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플래터에서 0.25마이크로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읽기/쓰기 헤드를 움직이기란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경쟁 속에 가속화된 기술 발전
IBM이 1960년대 업계를 독주하는 사이 다른 기술 기업들은 자체 스토리지를 제작해 IBM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할 기회를 모색했다. 당시 IBM은 대량 구매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정가를 청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66년 메모렉스(Memorex)는 세계 최초의 IBM 플러그 호환 드라이브 디스크 팩인 메모렉스 630을 개발했다. 메모렉스 630 디스크 드라이브 팩은 IBM 1311 디스크 드라이브에 비해 저장 용량은 4배 더 컸고 가격은 절반에 불과했다. IBM 1311의 판매 가격은 27,000달러였는데, 추정 제조 비용은 대당 1,700달러였다.

스토리지의 크기는 여전히 세탁기만했지만, 착탈식 디스크 팩으로 데이터 스토리지의 이동성이 더해졌다.

다른 기업들도 자체 스토리지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용 호환 스토리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플러그 호환 제조업체(PCM) 산업이 새로 형성됐다.

IBM에 도전하는 기업이 많아지자 IBM 엔지니어들에게 더 큰 기회가 찾아왔고 일부는 그 기회를 찾아 IBM을 떠나기 시작했다. “더 더티 더즌(The Dirty Dozen)”으로 불린 한 무리의 엔지니어들이 1967년 인포메이션 스토리지 시스템(Information Storage Systems, ISS)을 설립했고, 1969년 메모렉스로 이직한 앨런 슈거트와 함께 일하기 위해 IBM에서 퇴사한 사람들도 있었다(슈거트는 이후 드라이브 제조업체 슈거트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했고 이 회사가 나중에 시게이트 테크놀러지가 된다).

그러나 IBM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70년 휴대가 간편한 디스크 팩을 장착하는 방식의 3330 다이렉트 액세스 스토리지 퍼실리티(Direct Access Storage Facility)를 발표했다. 각 팩은 IBM 시스템/370 메인프레임용으로 100MB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었지만 데이터 전송 속도는 초당 806킬로비트로 RAMAC과 거의 비슷했다.

1972년에는 10디스크 착탈식 팩이 산업 표준 10.5인치 랙에 맞는 5디스크로 축소됐다. 읽기/쓰기 헤드는 3600RPM으로 회전하는 플래터에서 0.76마이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움직였다.

1973년 IBM은 이후 현대 하드 드라이브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3340 디스크 드라이브를 출시했다. 여전히 세탁기 크기였지만 30MB의 고정 데이터 저장 용량과 30MB의 이동식 디스크 팩을 장착했다. 3340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30-30구경 소총의 이름을 따서 “더 윈체스터(The Winchest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IBM 3340 드라이브는 최초로 밀폐된 읽기/쓰기 헤드를 탑재해 오염을 방지했으며 회전 디스크 플래터와의 거리를 0.46마이크로미터로 줄이고 평균 탐색 시간은 25밀리초로 낮췄다. 월 7.81달러로 리스가 가능했던 3340 HDD는 IBM의 새로운 저가 기술로 업계를 평정했다.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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