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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역사를 바꾼 15개의 터닝포인트

Neil McAllister | InfoWorld 2008.06.29
IBM이 최초의 PC를 개발 할 때 독점 소유권이 있는 칩을 사용하였더라면 오늘날의 컴퓨터 업계는 어떤 형태로 변모했을까? 아마 PC 조립 시장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닌 IBM이 컴퓨터 혁명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그의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제록스 PARC를 견학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PARC가 개발한 GUI를 보지 못했다면 그는 맥킨토시를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윈도우는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모든 산업들은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변화 속도가 빠른 IT 기술 업계는 다른 산업들보다 그 전환점이 많은 편이다. 지금부터 오늘날 컴퓨터 업계의 모습을 만들어 낸, 그리고 향후 업계의 모습에도 영향을 미칠 15가지 핵심 사건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애플의 위기 극복
1990년대 말, 애플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미지는 악화되어 있었고, 시장 점유율도 떨어지고 있었으며, 윈도우 NT와 윈도우 95는 기능면에서나 기술면에서 맥 OS를 압도했다.

코플랜드라는 코드네임으로 애플이 극비리 개발 중이던 차세대 OS는 애플의 기술 경쟁력을 다시금 강화시킬 회심작으로 기대 받아 왔다. 그러나 결국 이 OS는 출시도 해보지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지나친 야심이 부른 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코플랜드의 출시 일자가 계속 정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1996년, 당시 CEO 질 아멜리오는 애플 역사상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그는 돈 먹는 하마였던 코플랜드 프로젝트를 버리고, 신생기업 넥스트를 인수한다. 넥스트는 맥(Mac)에 적용할 수 있는 유닉스 기반 OS를 개발한 회사로써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CEO로 재직하는 기업이었다.

애플에 다시 합류한 잡스는 애플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의 성공작은 맥 OS X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이맥, 아이팟을 연이어 히트시켰고, 더불어 서버, 워크 스테이션, 그리고 휴대용 기기 부문의 시장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아멜리오는 결국 애플을 떠나게 되었지만, 넥스트 인수를 이끌어낸 그의 업적은 애플이 전혀 새로운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록스(Xerox)와 무료 소프트웨어의 등장
혹시 프린터에 문제가 생겼는가? 이번 사례는 프린터에 관한 것이다. 1980년, MIT의 인공 지능 연구소에서는 제록스에서 제작한 레이저 프린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수로 프린터를 다른 층에 설치했고, 사람들은 인쇄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MIT에서 공부하던 한 해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고, 그는 인쇄가 끝나면 자동으로 사용자들이 완료 이메일을 받을 수 있도록 프린터의 소프트웨어를 수정하고자 했다. 이미 기존의 제록스 프린터도 이와 같은 방식의 수정을 거친 후 사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시대가 급변하여, 저작권과 기업 비밀에 대한 권리가 강화 되면서, 제록스는 비공개 동의서의 서명 없이는 신제품의 코드를 공개해주지 않기 시작했다. 비공개 동의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 MIT 해커의 이름은 리처드 스털맨. 제록스에 대한 그의 분노는 곧 전설의 시작이 된다. 이 사건으로 스털맨은 저작권 소프트웨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GNU 프로젝트와 무료 소프트웨어 재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그래머들을 성가시게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총알을 피하다
적어도 2000년 한 해는 IT 업계의 황금기였다. 당시 IT 기업은 모든 것을 용서 받았다. 그 해 6월 마이크로소프트가 소프트웨어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권리를 남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미국 지방 법원 판사 토마스 펜필드 잭슨은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조직을 두 개로 분리할 것을 판결했다. 운영체제를 판매하는 조직, 그리고 애플리케이션을 판매하는 조직을 따로 쪼갤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 미국 항소 법원은 잭슨의 판결을 뒤엎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분할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두 개의 사업체로 분리되었다면, 오늘날 IT 업계의 판도도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시의 분할 명령을 거의 “사형 선고”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항소 법원이 잭슨의 결정을 번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시금 소프트웨어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윈도우 비스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핸드스프링, 스마트 폰 시대를 열다
1990년대 말, PDA 시장을 개척했던 팜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기타 경쟁자들에게 그들이 구축해 놓은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1998년, 한 무리의 팜 임원들은 팜 플랫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회사를 나와 핸드스프링을 창업했다.

차이점은? 핸드스프링의 PDA들은 하드웨어 모듈들을 추가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핸드스프링과 그의 제휴 회사들이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전화번호를 저장해주는 기능을 보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PDA를 통해 전화를 걸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고 또 실험해 보는 과정을 꾸준히 진행한 것이다.

이들의 노력은 결국 PDA에 부착할 수 있는 셀룰러 라디오 바이저폰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바이저폰은 큰 인기를 끌었고, 핸드스프링은 계속 달렸다. 곧 휴대폰과 PDA의 기능을 한 데 모은 단순하고 탄탄한 기기에 대한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다.

2001년 핸드스프링이 트레오를 선보이자, 자연스레 팜도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2003년 팜은 핸드스프링을 인수했고, PDA는 자연스레 더욱 다양한 기능을 보유한 스마트폰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스팸의 시초
현대 인터넷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알파넷(ARPANet)는 컴퓨터 연구자들, 생산업자들,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이 먼 거리에서도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메일과 같은 개념이었던 것이다.
1978년 어느 날, 디지털 이큅먼트의 마케터 게리 투어크는 새로운 전달 매체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한 두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메인 프레임 개발 라인을 소개하기 위해 개최하는 디지털 사의 다가오는 오픈 하우스에 대한 홍보가 더욱 수월해질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가 시연한 단체 메일은 세계 최초의 스팸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알파넷 관계자들은 그의 이러한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의 행위는 명백히 알파넷의 사용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알파넷은 공식적인 미국 정부 업무에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레이먼드 자홀는 주장하며, “이러한 상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합당한 방법을 강구해 낼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스팸 메일이 많아진 건지 해명해 주길 바란다 레이먼드 소령.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독점적 시장 구축
만약 1986년 무렵 PC를 사용했던 사람들이라면, 워드퍼펙트, 로터스 1-2-3을 사용했던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빠르면서도 다양한 기능을 갖춘, 도스(DOS)가 제공했던 최고의 프로그램들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부실한 프로그램들은 설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로터스와 워드 퍼펙트 모두 윈도우의 성공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애플리케이션이 사용자들의 운영체제 선택을 좌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미래는 그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사용자들은 GUI 기반의 소프트웨어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워드와 엑셀을 통해 사람들의 기대를 훌륭히 충족시켜 주었다.

199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두 소프트웨어에 파워포인트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추가, “오피스 스위트”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한데 모아 시장에 내놓게 된다. 결국 단일 제품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던 도스 기반 소프트웨어 로터스, 그리고 워드 퍼펙트와의 승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들이 경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기존 시장을 지배하던 프로그램들은 마이크로소프트보다 앞선 기능성으로 앞서나가려 했지만, 윈도우의 성장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그들의 결정이 결국 결정적인 패착이 되어버렸다.

루이스 거스너, IBM을 부활시키다
컴퓨터 업계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IBM이지만, 루이스 거스너가 CEO로 취임한 1993년, IBM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992년 무려 49억 7,0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미국 최고 기록이다) 한데다, 메인 프레임 판매 또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경영진들은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사업 부문들에 대한 스핀 오프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거스너는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IBM의 다양한 부문들을 통합하고, 간소화 함과 동시에 IBM의 소프트웨어 사업을 확대했고, 기업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서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IBM의 주력 사업군을 제품 생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전환환 것이다. 오늘날 IBM의 글로벌 서비스 부문은 2007년 한 해만 150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IBM 내 가장 큰 수익 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더불어 중요한 사실은, IBM의 이러한 변화가 다른 수 많은 기술 관련 기업들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원 또는 기부 수익에만 의존하며 무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오픈 소스 개발 업체들에게도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거스너는 파산의 기로에 서 있던 빅 블루(IBM의 별칭)를 인터넷 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멋지게 부활시켰다.

알파넷은 포르노용
1973년, 남가주 대학교의 알렉산더 서척은 그가 개발한 새로운 디지털 이미지 압축 알고리즘을 시험하는데 사용할 사진을 찾고 있었다. 그는 고급 광택지를 사용한, 포인트가 다양한, 더불어 사람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사진을 원했다. 연구실을 간단히 뒤진 그는 1972년 11월 플레이보이지 메인 모델이었던 레나 수즈블룸(Lenna Sjooblom)의 사진을 집어 들게 된다.

인터넷에 올린 자료들은 영원한 수명을 누린다고 했다. 서척이 선택했던 레나의 사진은 압축 기술 관련 연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사진이 되었고, 현재에도 수많은 압축 관련 주제의 논문에 등장하고 있다.

그 이후 서척의 선례를 따라 수많은 야한 사진들이 연구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괴짜들에게 공중망를 제공하라. 곧 그들은 이를 음란물들로 가득 채울 것이다.

동시성을 벗어난 웹
웹이 페이지 기반의 매체였던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용자들이 웹에서 이메일을 읽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각각 HTTP 요청은 곧 서버를 한 번 더 거쳐와야 함을 의미했고, 이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페이지를 자주 새로 고침 하게 만들었다.

아웃룩 웹 액세스 2000 (Outlook Web Access 2000)을 조금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들은 브라우저가 매우 소량의 데이터들을 비동시적으로 웹 서버에 전송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놀랍게도, 이 아이디어는 성공했다. 심지어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안 좋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모질라 프로젝트도 2002년 모질라 1.0에 이와 비슷한, XMLHttpRequest 라는 기능을 삽입했다. 새로운 개념의 웹 코딩 기술이 비로소 도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아약스 기반 사이트인 페이스북, 지메일, 구글맵스 등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덕을 봤다 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앞선 기술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만약 W3C가 XMLHttpRequest를 표준화 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마 지금도 계속 기다리고만 있었을 것이다.

리눅스, SCO 저지
2003년, 오픈 소스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리눅스에 검은 암운이 드리워졌다. CEO 달 맥브라이드가 이끄는 SCO 그룹이 리눅스 커널의 핵심 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SCO 그룹은 리눅스 사용자들에게 라이선스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고, 만약 응하지 않을 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SCO는 리눅스에 대한 기업들의 애정을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 특히 IBM은 리눅스 보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SCO 그룹이 빅 블루(IBM의 별칭)의 변호사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론이 분명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IBM의 변호사들은 SCO의 논거들을 하나 하나씩 무너뜨려 나가기 시작했고, 그들의 승리는 요원해져 갔다.

소송이 진행되면 될수록, 맥브라이드와 그의 회사는 점점 비웃음거리가 되어갔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리눅스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컴퓨터 어소시에츠, IBM, 노벨, 레드햇 모두 리눅스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쳤고, 결국 리눅스는 오픈 소스 운영체제로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리눅스를 죽이기 위해 시작되었던 소송이 리눅스의 황금기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텔, 메가헤르츠 신화를 뛰어넘다
PC 칩이 갓 개발되었을 무렵, 경쟁의 화두는 스피드였다. 경쟁 업체들보다 더 빠른 속도의 제품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소비자들이 뒤도 보지 않고 달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PC의 속도가 기가헤르츠 단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기존의 칩 디자인으로는 더 이상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데다 전력 소모량도 심해지기 때문이다. 이 때 물리 에덴(Mooly Eden)이 이끄는 이스라엘 하이파 연구소의 연구진들은 새로운 혁신적인 칩을 개발해 내는데, 그것이 바로 펜티엄 M이다.

애초에 모바일 PC용으로 2006년 처음 개발된 펜티엄 M은 곧 기존의 일반 PC CPU들에 비해 낮은 전력 소모량과 효율적인 인스트럭션 파이프라인으로 인해 데스크톱 PC 용으로도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인텔로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곧 인텔은 펜티엄 M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2006년 출시된 인텔의 코어 칩 시리즈도 펜티엄 M을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다. 기존에 사용되었던 인텔의 칩 구조는 올해 말 은퇴가 예정되어 있다. 이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더 빨라져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똑똑해져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웨어의 몰락

1985년 노벨의 네트웨어가 데뷔하기 전까진 플로피 디스크가 주된 파일 전송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네트웨어의 PC 네트워킹 기능은 순식간에 컴퓨터 업계를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1980년대 말 노벨은 PC 네트워킹 시장을 90% 이상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벨은 네트웨어의 아킬레스 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최신 인터넷 기술 적용 속도가 느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노벨은 마이크로소프트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모든 면에서 윈도우 NT는 네트웨어에 비해 무겁고 불편했지만, 단 한가지 장점이 있었다. 인터넷의 핵심 프로토콜인 TCP/IP을 지원했던 것이다. 네트웨어 서버들은 그 때까지 기존의 IPX, SPX 프로토콜에 의존했고, 이는 네트웨어 서버가 FTP 클라언트, 브라우저, 그리고 인터넷 이메일을 통합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인터넷에 대한 수요가 점점 들어나면서, 결국 기업들은 네트웨어 서버들을 윈도우로 바꾸기 시작했고, 네트웨어 네트워크는 이전 플로피 디스크가 걸었던 쇠퇴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걷게 되어버렸다.

신뢰성 확보를 책임지게 된 IT 업계
이전에는 IT 기업들이(물론 대형 IT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정부의 입김과 압력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사베인-옥슬리 법이 통과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엔론, 월드콤 및 여타 대기업들의 회계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의 신뢰도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신뢰도 강화는 곧 회계 감사를 의미하고, 감사를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한 법. 결국 사베인-옥슬리 법을 준수할 수 있는, 즉 방대한 기록을 정리 및 저장에 대한 임무가 IT 업계에 부여되고 말았다.

2005년에 들어, IT 관리자들은 SOX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모호한 규정과 검증되지 않은 기술들이 많은 추측들을 낳았다. 더불어 SOX 법에 시달리는 모습조차도 성에 안 찼는지, 의료 업계에서는 HIPAA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부여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이러한 법들의 합리성에 대한 검증이 다시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IT 업계의 현 상황에는 변할 것이 없을 듯 하다. 이미 법규 준수에 대한 의식이 기업 경영 전반에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애플, 칩 전략 뒤집다.
1997년 애플이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구호를 내건 유명한 광고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전에 맥킨토시는 항상 남들과 차별화된 결정을 해왔다. PC 칩 시장을 X86 플랫폼이 장악하는데 반발한 초기 맥 제품들은 모토롤라 68000 시리즈 CPU를 사용했다. 이후 성능 업그레이드에 대한 요구가 빈발하자, 파워PC로 변경했지만, 차별화 전략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 때문에 맥과 여타 PC들은 마치 사과와 오렌지의 관계처럼 항상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플도 대세를 영원히 거스를 순 없었다. 성능 향상의 한계, 그리고 엄청난 전력 소비량은 파워PC를 끈질기게 괴롭혔고, 결국 2005년에 들어 다목적 프로세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해 6월, 애플은 20년 간의 CPU 차별화 전략을 포기하고,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맥을 생산해 내겠다고 발표했다.

애플의 항복으로 인해 PC 프로세서 시장은 보다 더 단편화되었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컴퓨터들은 인텔의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최근엔 맥으로도 윈도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맥 팬들은 실망하지 말지어다. 애플의 차별화 전략은 외부 디자인의 차별화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아웃소싱,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다
2000년이 다가오면서, 미국 기업들은 Y2K 문제로 인해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Y2K에 대한 우려가 미국 노동 시장에 가져다 줄 여파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다.

Y2K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도와줄 일손이 부족해 지자, IT 부서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도움의 손길을 모색했고, 그들은 새로운 금광을 발견했다. 사회적, 경제적 개혁과 더불어 인터넷의 발달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몇몇 개발 도상국들이 수준 높은 전문가들을 다수 보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포시스와 와이프로 등을 포함한 인도 기업들은, 해외 IT 아웃소싱을 유행시킨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동유럽, 중국 등의 국가들도 현재 맹렬히 추격하고 있는 상태. 더불어 1990년 제정된 이민법 개혁 및 통제 법안 (Immigration Reform and Control Act)으로 인해 생긴 H-1B 비자 프로그램은, 미국 기업들로 하여금 외국인 직원들을 더욱 쉽게 채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 Y2K 문제는 우리에게 잊혀진 일이 되었지만, 해외 아웃소싱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인터넷이 점점 확산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IT 전문 인력들을 양산해 낼 것이다. IT 업계 종사자들은 점점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하루바삐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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