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7일차. 어제와 다른 도시에 와 있다. 언뜻 보기에는 구 소련 연방 같아 보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시티 17은 조용하다. 헤드크랩이라는 외계인의 도시인 이곳에서 필자는 권총을 차고, 무너진 노스 스타 호텔의 잔해를 보면서 행복했던 시절을 상상한다.
8일차에는 우주에 왔다. 9일차에는 사파리를 한다. 집을 떠나지 않고도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가상 현실은 고립된 현실을 떠나 제 정신을 유지하게 도와주고 있다.
‘온디맨드’ 세상
인정한다. 필자의 샌프란시스코 집, 즉 코로나19 위기용 ‘재난 대피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갖춰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운이 좋은 것 같다. 필자는 8년 동안 집에서 근무를 해 왔다. 책상이 있고, PC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침실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많다. 집은 익숙한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비디오 게임들이 계속 출시되었다. 둠 이터널(Doom Eternal), 동물의 숲(Animal Crossing), 컨트롤(Control)의 첫 확장팩이 계속 출시된 덕분에 아주 바빴었다.그래도 요 며칠은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유하자면 손가락이 부러진 상황과 닮았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약지 손가락은 부러지기 전에는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 손가락인지 체감하기 어렵다. 부러지고 나서야 약지의 중요성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데, 지금 상황이 꼭 그렇다. 그 동안 매일 밖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본 적이 없다. 원할 때마다 기사거리를 생각하면서 산책을 했는데, 이런 행동을 딱히 집 밖 세상으로 나가는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감자칩을 사기 위해 잠시 외출을 했던 것조차 그립다.
다행히 가상 현실이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 주, ‘하프 라이프: 알릭스(Half-Life: Alyx)를 입수했다. 그러면서 벽장에 넣어뒀던 밸브 인덱스(Valve Index)를 꺼냈다. 지난 여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 계속 사용을 미루고 있던 기기다. 가끔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경우, 오큘러스 퀘스트, 그리고 최근에는 오큘러스 링크 ‘케이블’을 이용했었다. 그러나 다른 게임도 아닌 ‘하프 라이프’였다. 가구 재배치 등 환경을 만드는 데에 30~40분을 투자해야 했지만, 기다리던 게임에 어울리는 좋은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싶었다.
이 과정은 어렵지는 않지만, 매우 짜증난다.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할 에너지를 애써 소환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과정을 마치면, 하프 라이프뿐 아니라 가상 현실 세계 전체가 활짝 열린다. 필자는 이번 주 이 헤드셋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이점도 있다. 책상에서 벗어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 온종일 앉아있지 않고, 일어나 걸어다니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귀중하다. 매일 VR을 이용해 운동을 하기도 한다. 필자가 한 시간 정도 심장박동 수를 높일 때 이용하는 게임은 비트 세이버(Beat Saber)와 피스톨 휩(Pistol Whip)이다. 피트니스 센터처럼 격렬한 운동은 못하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런 곳에서 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다. 가상현실은 10시간 가까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기본적인 유산소 운동을 보장한다.
운동은 작은 이점에 불과하다. 몇 시간 다른 장소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이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아파트 침실을 벗어나 다른 장소를 방문할 수 있다.
일반 게임에서는 이런 ‘탈출’을 만끽할 수 없다. 최소한 VR과 비슷한 수준의 해방감을 느낄 수는 없다. 물론 비디오 게임은 시간 때우기에 큰 도움을 준다. 며칠을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장소는 고작 침실이나 책상 앞에 한정돼 있어서, 둠 이터널로 며칠이라는 시간을 때웠지만, 여전히 고립감을 느꼈다.
그러나 가상 현실은 다르다. 실감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최고의 순간은 확실히 다르다. 나를 겹겹이 가로막았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헤드셋이 나를 집밖 세상으로 데려간다. 컨트롤러는 그 세상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연결해준다.
사실 구글 어스 VR을 즐길 때마다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 주 이런 생각에 다시 불이 붙었다. 베를린, 파리, 런던, 더블린, 시드니, 멕시코 시티, 뉴욕 등 세계 곳곳의 도시가 내 침실로 옮겨진다. 물론 구글 스트리트 뷰는 실제 세상을 미흡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가상 현실은 차선책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명 관광 명소를 여행하면서, 그 시기의 수많은 인파들을 보다 보면 ‘평범하고 무사한’ 세상과 연결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된다.
하프 라이프도 구글 어스만큼 ‘소중’했다. 어쩌면 더 ‘소중’했을지 모르겠다. 시티 17은 가상의 장소다. 그러나 생생한 현실처럼 느껴져서 며칠을 확장팩 알릭스의 리뷰에 투자했다. 이미 알릭스를 리뷰하는 긴 기사를 썼다. 따라서 여기에서 장황하게 알릭스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필자에게 전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전투보다는 황폐한 동물원 주변을 돌아다니고, 가동이 중단된 증류소를 탐험하는 것을 즐겼다.
이 가상의 장소에서는 헤드크랩에 총을 쏘는 것 말고는 할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주를 다시 생각해 보면, 집을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최소한 필자의 머리속에서는, 4제곱미터짜리 똑같은 침실에 갇힌 갑갑한 상태는 아니었다. 동물원에 있었고, 양조장에 가보고, 여러 장소에서 탐험을 즐긴 것이다.
매일 격리된 상태인 필자의 일상에서 가상 현실이 필수 요소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는 이번 주 초 런던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해서 데이빗 아텐버러와 수다를 떨었다. ‘홀드 더 월드(Hold the World)’ 덕분이었다. 오늘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이다. 아트 플런지를 이용해서, 3D로 재현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즐기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보관 중인 가상현실 기기도 있다. 론 에코(Lone Echo)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독하게 우주를 떠돌아다녔다. 긴장을 풀고 싶을 때는 테트리스 이펙트(Tetris Effect)와 틸트 브러시(Tilt Brush)를 해볼 수 있다. 한 번도 끝내지 않은 아르티카(Arktika) 1도 있다. 메트로 엑소더스(Metro Exodus)를 즐겼기 때문에 끌리는 게임이다.
지난 주 출시된 더 룸 VR(The Room VR) 또한 탐험할 또 다른 장소들을 제공한다. 개발사인 파이어프루프(Fireproof)가 하프 라이프와 같은 주에 더 룸 VR을 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은 주에 신제품을 출시한 결정에 감사를 보낸다.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 파이어프루프는 ‘공간(Room)’ 설정에 항상 능력을 발휘했던 회사이다. 더 룸 VR의 모든 장소는 장면 곳곳에 겹겹이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프 라이프보다 규모가 작고 환경이 실제와 똑같지는 않지만, 많은 머신을 조작하면서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해독하는 재미에 몰입감이 있다.
이 게임에 빠져든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흘렀다.
결론
가상 현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상 현실의 보석 같은 장점이다. 사실 글로벌 팬데믹 위기 때문에 가상 현실의 장점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상 현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이론에 불과했다. 과거 페이스북이 홍보했던 VR 애플리케이션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제 이 기기가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고 현실이 된 것이다.그렇다고 모든 것을 소셜 VR로 전환하게 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헤드셋으로 미팅 등의 업무를 해보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상 현실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 가상 현실은 실제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가까스로 대신해줄 뿐이다. 그러나 덕분에 고립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침실 밖에 세상이 있는데도 그 곳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상 현실은 최소한 몇 시간 정도 그 세상을 필자에게로 가져오는 기술이 되어주었다.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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